* Cocreation : 상호창조론
-> 신이 이 세계를 창조함과 동시에 이 세계가 신을 창조했다.
즉, 신은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세계와 함께하는 것이다.
* 현재의 신 God(하나님)에 대한 왜곡
1) 유대교의 예언자를 닮아갔다.
2) 로마의 황제의 모습을 닮아갔다.
3) 아리스토텔레스 주장이후 불변의 원리로서의 모습을 닮아갔다.
-> 신은 하늘에 계신 것도 아니요,
알렌 선교사가 우리나라에 선교한 이후에 생긴것도 아니요,
신은 전지전능한 것도 아니요,
신은 죽은 후에 심판하는 자도 아니요,
신은 미래를 아는 예언자도 아니요,
신은 우리와 분리된 존재가 아니다.
-> 신은 우리(이세상, 이우주)와 함께 탄생하여 공존하는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같은 존재이다.
오히려 파라독스(Paradox)와 유사하다.
태초 : 무(공집합)에서 유(우주:전체집합)를 창조한다.
태초에 무(공집합)은 완벽한 무(공집합)가 아니다.
Why? ->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유(전체집합)은 완벽한 유(전체집합)이 아니다.
Why? ->전체집합에는 공집합이 포함되어 있는데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포함하는 순간 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무는 God 신이라고 할 수 있고, 유는 우주라고 할 수 있다.
이는 Cocreation 관계에 있기 때문에...
바꾸어, 유를 God 신이라고 할 수 있고, 아것도 없는 무를 사람을 포함한 만물 우주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하이델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와도 통한다.
질량과 위치정보는 동시에 정의할 수 없는 것이다.
위치를 고정하면 질량이 무한데가 되고, 질량을 고정하면 변위가 무한데가 된다.
우리는 고정된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변화하는 찰나에 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거시적으로 세상을 볼 수 없다. 순간으로 만물을 해석하므로, 순간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모순을 피해, 논리적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논리의 한계이며, 완벽한 논리를 추구하면 결국 자기 모순에 빠지게 되어 비논리에 봉착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완벽하지 않은것, 비논리를 포함하는 더 큰틀(거시적 Scope)에서 모순을 인정하고 포괄적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을 이해 한다면, 노자 사상을 이해할 수 있다.
신을 신이라 규정지을 수 있다면, 그것은 더이상 신이 아니요.
나를 나라고 규정짓는 순간 그것은 진정한 내가 아니다.
나 = 신 = 우주 모두 지금 현재 순간을 같이 하는 포괄적 같은 존재로 보아야 한다.
완벽에 도달하면 그것은 더이상 완벽이 아니요,
죽음에 도달하면 그것은 더이상 죽음이 아니다.
세계의 종교(기독교,이슬람교,불교,힌두교)는 모두 편협하여 믿을 수 없고,
여기까지가 생각하는 박정기가 공부하여 깨달은 진리가 아닌 진리이다.
-> 신이 이 세계를 창조함과 동시에 이 세계가 신을 창조했다.
즉, 신은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세계와 함께하는 것이다.
* 현재의 신 God(하나님)에 대한 왜곡
1) 유대교의 예언자를 닮아갔다.
2) 로마의 황제의 모습을 닮아갔다.
3) 아리스토텔레스 주장이후 불변의 원리로서의 모습을 닮아갔다.
-> 신은 하늘에 계신 것도 아니요,
알렌 선교사가 우리나라에 선교한 이후에 생긴것도 아니요,
신은 전지전능한 것도 아니요,
신은 죽은 후에 심판하는 자도 아니요,
신은 미래를 아는 예언자도 아니요,
신은 우리와 분리된 존재가 아니다.
-> 신은 우리(이세상, 이우주)와 함께 탄생하여 공존하는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같은 존재이다.
오히려 파라독스(Paradox)와 유사하다.
태초 : 무(공집합)에서 유(우주:전체집합)를 창조한다.
태초에 무(공집합)은 완벽한 무(공집합)가 아니다.
Why? ->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유(전체집합)은 완벽한 유(전체집합)이 아니다.
Why? ->전체집합에는 공집합이 포함되어 있는데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포함하는 순간 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무는 God 신이라고 할 수 있고, 유는 우주라고 할 수 있다.
이는 Cocreation 관계에 있기 때문에...
바꾸어, 유를 God 신이라고 할 수 있고, 아것도 없는 무를 사람을 포함한 만물 우주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하이델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와도 통한다.
질량과 위치정보는 동시에 정의할 수 없는 것이다.
위치를 고정하면 질량이 무한데가 되고, 질량을 고정하면 변위가 무한데가 된다.
우리는 고정된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변화하는 찰나에 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거시적으로 세상을 볼 수 없다. 순간으로 만물을 해석하므로, 순간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모순을 피해, 논리적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논리의 한계이며, 완벽한 논리를 추구하면 결국 자기 모순에 빠지게 되어 비논리에 봉착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완벽하지 않은것, 비논리를 포함하는 더 큰틀(거시적 Scope)에서 모순을 인정하고 포괄적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을 이해 한다면, 노자 사상을 이해할 수 있다.
신을 신이라 규정지을 수 있다면, 그것은 더이상 신이 아니요.
나를 나라고 규정짓는 순간 그것은 진정한 내가 아니다.
나 = 신 = 우주 모두 지금 현재 순간을 같이 하는 포괄적 같은 존재로 보아야 한다.
완벽에 도달하면 그것은 더이상 완벽이 아니요,
죽음에 도달하면 그것은 더이상 죽음이 아니다.
세계의 종교(기독교,이슬람교,불교,힌두교)는 모두 편협하여 믿을 수 없고,
여기까지가 생각하는 박정기가 공부하여 깨달은 진리가 아닌 진리이다.